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
2022년 6월 29일에 개봉했다.
고전적이면서 현대적인 방식으로 영원불멸의 사건과 사랑을 이야기하는 영화이다.
헤어질 결심은 수사물 100%와 로맨스 100%로 구성되어있다.
사실 50:50이라 말해도 전혀 문제가 없지만, 영화를 감상할 때
오로지 수사물로 보아도 100%의 만족감을 받을 수 있고,
로맨스물로 보아도 100%의 만족감을 받을 수 있다.
마치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은 듯하다.
아무튼, 영화는 해준(박해일)이 담당한 사건의 용의자 서래(탕웨이)를 수사하며 진행된다.
후에 발생할 사건의 담당 형사도 해준이며 용의자 또한 서래이다.
즉, 영화는 수사물로 시작하여 수사물로 끝이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헤어질 결심은 명백한 로맨스물이다.
사망사건의 용의자로 의심받는 서래,
이를 수사하는 해준,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감정선.
전형적이고 고전적이며 흥미로운 주제가 아닐 수 없다.
헤어질 결심의 포스터에 적힌 문구가 재미있다.
의심, 관심 그리고 헤어질 결심.
이 문장은 영화의 기승전결을 요약한다.
해준은 서래를 의심하여 수사한다.
해준의 의심은 관심이 되고,
영화의 후반 서래는 헤어질 결심을 하게 된다.
서래가 진범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해준.
서래에게 자신이 가진 품위의 근원이 '여자에 미쳐서' 붕괴되었다고 말한다.
이후, 서래가 진범이라는 증거물을 서래에게 주며 바다에 빠뜨려 없애버리라 한다.
사랑한다는 직접적 표현은 없지만, 사랑한다는 말과 같다.
영화의 후반부,
서래는 해준에게 중국말로 말한다.
“당신이 사랑한다고 말할 때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났을 때 내 사랑이 시작됐다.”
즉, 해준이 서래에게 이별을 고할 때 해준의 사랑은 끝이 났고,
해준의 사랑이 끝났을 때 서래의 사랑이 시작됐다는 말이다.
사망사건을 수사할 때 해준이 반복하는 말이 있다.
“어떤 사람은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어떤 사람은 잉크처럼 천천히 번진다.”
사람마다 슬픔에 빠지는 속도가 다른 것처럼,
해준과 서래도 사랑에 빠지는 속도가 달랐던 것이다.
서두에서 영화가 영원불멸의 사건과 사랑을 이야기한다고 적었다.
사실 영화의 작은 사건들은 영원불멸하지 않다. 살펴보자.
여자가 남편을 죽였고, 이는 완전 범죄였다.
해일은 용의자로 의심받던 과부와 사랑에 빠졌고, 사랑하는 중에 서래가 진범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해일은 서래를 떠났고, 서래는 새로운 사람과 결혼한다.
서래의 새로운 남편이 죽었고, 이 사건의 담당자가 해일이다.
수사물이라면 충분히 있을만한 사건의 연속이다.
서래는 이 모든 것을 영원불멸하게 만든다.
이렇게 진부한 사건들을, 진부한 불륜 이야기를.
이미 종결된 사건을 영원히 남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서래는 사건을 재수사하라고 말한다.
이미 끝나 버린 사랑을 영원히 남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서래는 처음 사랑에 빠지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서래의 방식으로는 사건과 사랑이 영원불멸 해질 수 없다.
재수사된 사건은 언젠가 종결될 것이고,
재시작된 사랑은 언젠가 결실을 맺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허점을 해결하기 위해 서래는 헤어질 결심을 한다.
사건을 영원히 미결로 남기기 위해,
해준이 서래를 의심하고, 관심을 가지던 그 순간을 영원히 지속하기 위해.
영화는 고전적인 설정을 가진 수사물을 뒤집어 멜로 영화로 바꾸었다.
영화는 사건의 흐름, 등장인물 간의 감정선 등을 매우 불친절하게 관객에게 전달한다.
가령, '해준이 서래에게 관심이 생겼다'라는 정보를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해
취조실에서 모둠초밥을 먹는 해준과 서래를 보고 수완(고경표)이 '경비처리가 되지 않는다'는 암시를 주는 대사를 던지는 것이다.
영화는 두 사람의 감정선 조차도 관객이 읽기 어렵게 만든다.
관객은 등장인물의 대화를 통해 그들의 감정선을 섬세하게 따라가게 되는데,
'서래가 중국인이고, 한국말이 서툴다'는 설정 때문에
서래와 해준이 조금이라도 수준 높은 대화를 시작하면, 감정이 완전히 배제된 번역기가 대화를 대신한다.
영화는 번역기를 사용함으로써 대화와 대화 사이 간격을 이격 시키고, 등장인물의 감정을 배제하여 관객에게 전달한다.
관객이 서래와 해준 사이의 감정선을 읽어내기 어렵도록 방해하는 것이다.
영화는 이토록 불친절하게 관객을 대한다.
불친절의 결과물은 불편함이다. 관객이 영화를 따라가고 이해하기 불편해진다는 말이다.
편함의 정도는 곧 속도와 직결된다.
관객이 영화를 따라가고 이해하기 불편해진다면, 관객이 영화를 따라가고 이해하는 속도가 느려진다.
관객이 영화를 따라가고 이해하기 편해진다면, 관객이 영화를 따라가고 이해하는 속도가 빨라진다.
헤어질 결심은 불편한 영화이기 때문에, 관객이 영화를 따라가고 이해하는 속도가 느려진다.
헤어질 결심이 가지는 가장 큰 매력은 여운이다. 그런데 이 여운조차 불편하다. 여운을 이해하는데 오래 걸린다는 말이다.
헤어질 결심이 관객에게 남기는 여운은 '즐거움', '감동', '슬픔', '쾌감', '스릴' 같은 직관적인 무엇이 아니다.
헤어질 결심이 관객에게 남기는 여운은 '영화의 흐름과 줄거리를 복기하고 이해하며 스스로 영화를 이해하는 즐거움'이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영화가 관객에게 선사할 수 있는 가장 큰 즐거움 일 것이다.
영화가 관객에게 제공되는 찰나의 순간에 휘발되는 일방적 즐거움과 다르게
관객이 영화로부터 제공받은 정보를 토대로 스스로 즐거움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영화 '헤어질 결심'은 거의 모든 부분에서 영화적 재미를 선사한다.
이 영화가 개봉된 지 일주일 즈음 지났지만, 56만 관객을 동원하는데 그쳤다.
본문에서 헤어질 결심이 주는 즐거움이 '세상의 모든 영화가 관객에게 선사할 수 있는 가장 큰 즐거움'이라 칭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런 종류의 즐거움이 현대에선 그다지 선호되는 즐거움이 아닌 것 같다.
순식간에 휘발되며 무엇도 잔류하지 않는 순간의 감정과 즐거움. 이런 것을 추구하는 듯하다.
최근 미디어 수용자들의 행태는
어떤 행위를 하는 즉시 효과가 없다면 재미없고, 의미 없는 것이라 느껴버리는 것 같다. 즉각적 즐거움만을 추구하는 것이다.
만일 즉시 효과가 없더라도 의미와 재미가 있다면, 그 행위를 하는 당시에 나는 행위가 행해졌음을 몰라야 한다.
콘텐츠가 선사하는 즉각적 즐거움을 만끽하는데 방해되기 때문이다.
제작자가 '숨겨놓은' 점차적 즐거움 또한 즉각적 즐거움으로 변환되어 소비된다.
유튜브와 SNS 등에서 또 다른 누군가가 'ㅇㅇㅇ에 숨겨진 의미'같은 이름으로써 수용자에게 즉각적 즐거움을 제공하는 것이다.
영화를 볼 때 평론가와 관객의 평점이 갈리는 경우가 많다는 인식이 있다.
이젠 '갈리는 경우가 많다' 수준이 아니라 완전히 갈라선 것만 같다.
관객은 즉각적 즐거움의 크기에 비례하여 점수를 주고,
평론가는 점차적 즐거움의 세밀함에 비례하여 점수를 주는 듯하다.
사실 즉각적 즐거움과 점차적 즐거움은 어느 하나가 우월하거나 가치 있는 것이 아닌,
완전히 다른 즐거움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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