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 사랑이었다. [건축학개론]
이용주 감독의 건축학개론.
2012년에 개봉했다.
개봉한 지 10년이 지난 영화임에도 여전히 볼만한, 그리고 새롭게 느껴지는 영화다.
10년 전 영화의 배경이 가지고 있는 문제로 인해 현시점에서의 평가는 확실히 나뉘는 영화다.
01. 주제
건축학개론은 첫사랑에 대한 영화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라는 포스터의 문구처럼 영화는 확실히 첫사랑을 다루고 있다.
따라서, 영화의 주제는 첫사랑이다.
승민과 서연의 대학교 1학년 시절 엇갈린 첫사랑을 오랜시간이 지나 재회한 둘의 회상으로써 되돌아본다.
영화는 첫사랑이라는 주제말고, 또 다른 주제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 승민이 걷어차서 찌그러진 대문을 펴보려 끙끙대는 현재 승민.
'낯설다'는 이유로 집을 새로짓지 않고 증축하는 현재 서연.
과거 승민이 자신에게 주려했던 건축모형을 보관 중인 현재 서연.
과거 서연이 첫눈오는날 둘만의 장소에 놓고 간 CD플레이어와 전람회 앨범을 보관 중인 현재 승민.
이는 모두 등장인물의 미련을 드러내는 장면들이다.
영화는 첫사랑과 함께 미련도 다루고있다.
첫사랑, 첫사랑을 다루는 영화는 흔히 첫사랑에 대한 미련을 함께 다루기 마련이다.
하지만 건축학개론은 첫사랑과 첫사랑에 대한 미련을 다루고 있는 것은 물론,
미련 그 자체를 다루고있기도 하다.
02.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썅년이었다.
첫눈오는날 만나자는 납뜩이의 조언을 듣고 서연에게 첫눈 오는 날 뭐하냐고 물어보는 승민.
막상 만나자는 이야기는 하지못하고 주저한다.
이때, 서연이 먼저 첫눈 오는날 만나자는 약속을 건넨다.
서연에게 선물을 주기위해 하루 종일 서연의 집 앞에서 기다린 승민.
술에 취해 몸도 가누지 못하는 서연을 재욱이 부축하며 집안으로 들어간다.
불이 켜진 서연의 집, 창문의 커튼 때문에 실내의 상황을 알 수 없다.
승민의 시야를 차단하는 커튼을 승민이 직접 달아준 것이 아이러니하다.
이 장면에서 납뜩이는 서연을 썅년이라 욕하며 승민을 위로한다.
위 연속된 세 가지 장면을 보면 서연은 욕먹을 이유가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납뜩이는 서연을 욕하고, 승민 역시 말없이 울고 있을 뿐이다.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를 해결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탓할 대상을 찾는 것이다.
사건과 관련된 많은 대상 중에, 가장 만만한 대상.
그 대상을 욕하고, 탓함으로써 자신의 잘못을 감추거나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승민의 입장에서 보자면 서연은 먼저 첫눈 오는 날 만나자는 약속을 건넸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남자와 잤다.
그렇기 때문에 서연은 썅년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서연의 입장에선 억울하다.
자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화가 개봉하던 2012년과 달리,
2022년의 우리가 보기에 서연은 그저 성범죄피해자일뿐이다.
욕하고, 탓할 대상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승민은 서연을 탓한다.
서연의 책임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라.
03. 사랑도 인생도 신축은 어렵다. 과거를 안고 증축할 뿐
씨네 21 김혜리 평론가의 한줄평이다.
영화 내도록 이어지는 두 주인공의 감정선과 영화의 주제를 한 번에 요약하는 한줄평이다.
영화는 어떤 경우에도 행해진 과거가 만들어내는 결과를 변화시키지 않는다.
놓고 간 CD플레이어와 전람회 앨범을 보고 서연의 마음을 확인한 승민.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민은 서연에 대한 마음을 바꾸지 않았고, 둘은 이어지지 않았다.
화풀이로 걷어차서 찌그러진 녹색 대문.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며 펴보려 하지만 결국 펴지지 않는다.
잠든 자신에게 키스한 승민. 이를 알고 있는 서연.
하지만 당시에 서연은 모르는 척했고, 이는 곧 아무 일도 없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서연에게 흔들리는 현재의 승민, 하지만 현실에 부딪혀 결혼을 진행하고 미국으로 떠난다.
이렇게 영화는 행해진 과거가 만들어낸 결과, 현재를 변화시키지 않는다.
극 중에서 현재 승민과 현재 서연은 과거가 만들어내는 결과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따라간다.